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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미 게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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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나미 게이스케는 1833년 출생한 인물로, 신선조의 부장이었다. 그는 북진일도류의 면허개전을 받았으며, 곤도 이사미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시영관에 입문하여 천연이심류를 익혔다. 1863년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로 상경했고, 신선조 부장으로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활동했다. 1865년 신선조를 탈주한 후 오키타 소지에게 체포되어 할복했으며, 곤도 이사미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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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미 게이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야마나미 게이스케
일본어 이름야마나미 게이스케 (山南 敬助)
출생1833년 2월 5일
사망1865년 3월 20일
출생지일본, 센다이 번
묘지일본, 교토 부, 교토 시, 고엔지 (교토 시)
군사 정보
소속도쿠가와 막부
복무 기간1863년–1865년
계급부장
소속 부대

2. 생애

무쓰국 센다이번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에도로 오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검술 유파는 북진일도류와 천연이심류를 익혔으며, 특히 북진일도류에서는 1860년 이전에 면허개전(免許皆伝)을 받았다. 1860년 곤도 이사미와의 시합에서 패배한 후 에도의 천연이심류 도장 시영관에 입문하였다. 그는 문학과 병법에 능통하고 친절하며 온화한 성품을 지녀, 시영관 동문들, 특히 오키타 소지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1863년, 곤도 등 시영관 동료들과 함께 로시구미에 참여하여 교토로 향했고, 이후 미부 로시구미(훗날 신센구미) 결성에 기여했다. 초기에는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부장을 맡았으며, 세리자와 카모 등 초기 간부들이 숙청된 후에는 신설된 총장(総長|소초일본어) 직위에 올라 조직 내 세 번째 서열이 되었다. 학식과 온화한 성품으로 '신센구미의 두뇌' 역할을 했으나, 1864년 이케다야 사건에는 병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고 본부를 지켰다.

총장 취임 이후 점차 활동 기록이 줄어들었으며, 특히 1864년 말 이토 카시타로가 참모(参謀|산보일본어)로 영입되면서 조직 내 입지가 좁아진 것으로 보인다. 1865년 초, 니시혼간지로의 둔소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곤도, 히지카타와의 의견 대립이 심화되었다. 야마나미는 지도부의 강압적인 방식과 커져가는 권력 의지에 반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1865년 음력 2월 23일 (양력 3월 20일), "에도로 돌아가겠다"는 글을 남기고 탈주했으나, 오미국 오쓰시에서 오키타 소지에게 붙잡혀 돌아왔다. 신센구미의 엄격한 법도에 따라 할복을 명받았으며, 자신의 희망에 따라 오키타 소지를 개입인(카이샤쿠닌)으로 하여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신센구미 내부의 노선 갈등과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묘소는 교토 미부의 光縁寺|코엔지일본어에 있다.

2. 1. 출생과 초기 이력

덴포 7년(1833년)에 태어난 것으로 여겨진다[2]. 분큐 3년(1863년) 2월 말에서 3월 초 사이에 작성된 『낭사 성명부』에 야마나미의 나이가 "28세"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다른 세 개의 자료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어 그의 출생년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평가된다[2].

에도로 오기 전의 출신과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1]. 일반적으로 무쓰국 센다이번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1], 센다이 번 검술 사범의 아들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야마나미가 센다이번번사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1].

검술북진일도류를 익혀 창시자 치바 슈사쿠 나리마사에게서 수련했으며, 1860년 이전에 면허개전(免許皆伝, 전수 면허)을 받았다[1]. 이후 1860년, 곤도 이사미와의 시합에서 패배한 뒤 에도에 있는 천연이심류의 시영관 도장에 입문했다. 당시 시영관은 1861년부터 곤도가 운영하고 있었다.

야마나미는 문학 및 군사 기술에도 능통했으며,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시영관 시절, 훗날 신센구미의 1번대 대장이 되는 오키타 소지는 야마나미를 매우 존경하여 형처럼 따랐다고 한다.

2. 2. 곤도 이사미와의 만남

무쓰국 센다이번 출신으로 알려진 야마나미는 북진일도류의 창시자인 치바 슈사쿠 나리마사에게 검술을 배웠으며, 1860년 이전에 면허개전(免許皆伝, 전수 면허)을 받았다.

1860년, 야마나미는 곤도 이사미가 있는 에도의 천연이심류 검술 도장인 시위관(試衛館)에 찾아가 타류 시합을 신청했다. 이 시합에서 곤도에게 패배한 야마나미는 그의 실력과 인품에 감명받아 시위관에 입문하게 되었다. 곤도는 1861년부터 시위관의 4대 종가를 이어받아 도장을 운영했다. 당시 시위관에는 훗날 신선조의 주요 간부가 되는 히지카타 토시조,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등이 함께 수련하고 있었다.

야마나미는 문학과 병법 등 학식이 깊었으며,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졌다. 특히 오키타 소지는 야마나미를 형처럼 따르며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입문 후 야마나미는 시위관의 주요 행사에도 참여했다. 분큐 원년(1860년) 8월에는 후추 육소궁에서 열린 곤도의 천연이심류 4대 종가 계승 기념 야외 시합에 참가했으며, 이듬해인 분큐 2년(1861년) 정월에는 오키타 소지와 함께 오노지(小野路) 마을에 검술을 가르치러 가기도 했다.

2. 3. 신센구미 활동

분큐 3년(1863년) 2월, 쇼군 경호와 존황양이를 목적으로 키요카와 하치로가 로시구미를 조직하자, 야마나미는 곤도 등 시에이칸 동료들과 함께 이에 참가하여 교토로 상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요카와가 양이 실행을 내걸고 에도로 돌아가려 하자, 이에 반대한 미토번 출신 세리자와 카모나 곤도 등은 교토에 남았고, 야마나미도 이들과 함께 잔류했다. 이들은 교토 수호직을 맡고 있던 아이즈 번의 관할 아래 들어가 미부 로시구미를 결성하게 된다. 3월 6일, 야마나미는 "외로이 하늘 끝에 뜻을 두었으니, 충성을 다하는 것은 오직 칼 안에 있네. 만 리의 험난한 길도 사양하지 않으리, 어서 황주를 향해 공을 세우리라"는 칠언절구를 썼다.

미부 로시구미 결성 초기, 주도권 다툼으로 3월부터 4월에 걸쳐 토노우치 요시오와 이에자토 지로가 숙청당하면서 세리자와 파와 곤도 파가 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야마나미는 곤도 파의 히지카타 토시조와 함께 부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9월, 내부 갈등으로 필두 국장 세리자와 카모와 국장 니이미 니시키가 숙청되었다. 야마나미는 세리자와 암살에 연루된 시에이칸 멤버 중 한 명이었다고도 전해진다. 이 숙청 이후 미부 로시구미는 곤도 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고, 조직 재편 과정에서 야마나미는 신설된 총장(総長|소초일본어) 직위에 올라 국장 곤도,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에 이어 세 번째 서열이 되었다.

분큐 3년(1863년) 10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경호를 위해 오사카에 체류하던 중, 고라이바시 근처 옷감 상인 이와키 마스야에 불령 로시들이 들이닥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야마나미는 히지카타와 함께 현장에 달려가 격전 끝에 이들을 격퇴했다. 이 공로로 아이즈 번마쓰다이라 가타모리로부터 금 8량을 하사받았다. 이 전투에서 야마나미가 사용하던 摂州住人赤心沖光作|셋슈 주민 셋신 오키미츠 작일본어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2척 8치 5푼(약 86.4cm)의 칼은 심하게 손상되어 칼끝에서 1척 1치(약 33.3cm) 지점에서 부러졌으며, 야마나미 자신도 왼쪽 팔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 부러진 칼의 오시가타(칼의 형태를 종이에 베껴 그린 그림)는 히지카타가 코지마 시카노스케에게 보냈으며, 현재 코지마 자료관에서 모사본을 볼 수 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의 이케다야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고, 대신 본부(둔소)를 지켰다. 나가쿠라 신파치의 수기 『낭사 문구 보국 기사』에는 야마나미가 병 때문에 둔소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 8월 8월 18일의 정변 당시에는 교토 고쇼 경비에 동원되었으며, 이틀 후에는 교토에 잠복해 있던 조슈 번 출신 낭사들을 히지카타 등과 함께 참살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총장 취임 이후, 야마나미의 이름은 신선조의 활동 기록에서 점차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특히 겐지 원년(1864년) 11월, 야마나미와 동문(북진일도류)이자 학식이 높았던 이토 카시타로가 신센구미에 입대하면서 상황은 더욱 미묘해졌다. 신센구미는 이토를 영입하기 위해 야마나미의 총장직보다 상위 직책인 참모(参謀|산보일본어) 자리를 신설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고, 이로 인해 야마나미는 간부로서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것으로 보인다.

2. 4. 탈주와 죽음

원지 2년(1865년) 2월, 야마나미는 "에도로 간다"는 유서를 남기고 신센구미를 탈주했다. 신센구미의 법도에 따르면 탈주는 할복으로 처벌받는 중죄였다. 그의 탈주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가장 유력한 설은 니시혼간지로의 둔소(屯所, 주둔지) 이전 문제와 관련된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와의 갈등이다. 신센구미 대원이 늘어나 미부의 둔소가 비좁아지자, 곤도와 히지카타는 교토 시내의 니시혼간지로 이전을 결정했다. 니시혼간지는 존왕양이 성향이 강하고 조슈번과도 관계가 깊은 사찰이었기에, 곤도는 이곳을 장악하여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존왕 사상이 강했던 야마나미는 사찰 승려들에 대한 강압적인 방식에 반대하며 재고를 요청했다. 그는 곤도와 히지카타의 자만심과 권력 의지가 커지면서 신센구미가 초기의 충성스럽고 애국적인 목적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로물루스 힐스버러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견해 차이와 함께, 시모자와 칸의 소설 『신센구미 시마쓰키』에서 언급된 히지카타와의 경쟁 관계를 소개하기도 했으나, 이는 역사 소설로 분류된다. 또 다른 설로는 야마나미가 쇼군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적 결정에 환멸을 느껴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는 추측도 있다.

탈주 소식을 들은 곤도와 히지카타는 즉시 오키타 소지를 추격대로 파견했다. 히지카타는 평소 야마나미가 동생처럼 아끼던 오키타라면 야마나미도 순순히 따를 것이라 생각하여 오키타만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야마나미는 오미국 오쓰시에서 오키타에게 따라잡혀 체포되었고, 미부의 둔소로 되돌아왔다.

이토 가시타로나가쿠라 신파치는 야마나미에게 다시 탈주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유녀 아카리와의 마지막 작별 일화는 나가쿠라 본인의 수기에는 기록이 없어 고모자와 간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원지 2년(1865년) 음력 2월 23일 (양력 3월 20일), 야마나미는 할복했다. 향년 33세. 개입인은 그의 희망에 따라 오키타 소지가 맡았다. 곤도는 그의 최후를 보고 "아사노 다쿠미노카미[5]라도 이처럼 훌륭하게 죽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6] 그의 묘는 교토 미부의 光연사|光縁寺|코엔지일본어에 있다.

야마나미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토 가시타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봄바람에 불려 유혹된 산벚꽃

: 흩날려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주네

: 부는 바람에 시들기보다 산벚꽃

: 흩날리고 흔적 없는 꽃이 용맹하네

3. 인물됨

야마나미 게이스케는 친절하고 온화한 성품에 학식이 깊은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히지카타 토시조와는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우애가 깊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마음씨 착하고 온후한 성격 덕분에 미부의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흠모를 받았으며, 그 주변에서는 "친절한 사람은 야마나미·마츠바라"라는 말이 메이지 시대 초까지 전해졌다. 대원들 사이에서도 "산난 씨"라고 불리며 친근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신선조유문』에는 세리자와 등과는 달리 대내외적으로 평판이 좋았다는 기록이 있다.

8월 18일 정변 당시 고쇼 경비에 나설 때, 콘도와 히지카타는 이미 갑옷을 입고 있었으나 자신에게는 갑옷이 지급되지 않은 것에 크게 분개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때는 친했던 마츠바라 타다시가 달래주었다고 한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도 알려져, 신센구미의 원조자였던 코지마 시카노스케는 그를 "무인이며 문(文)이 있다"고 평가했다. 신센구미에 비판적이었던 니시혼간지의 니시무라 겐분조차, 『미부 낭사 시말기』에서 야마나미를 "조금은 사리를 분별하는 자(조금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사람)"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미부 시대 신센구미 간부들의 숙소였던 야기 가문의 아들 야기 타메사부로에 따르면, 야마나미는 "키는 그다지 크지 않고, 피부가 하얀 애교 있는 얼굴"이었으며, "아이들을 좋아해서, 어디서 만나든 꼭 말을 걸었다"(『야기 타메사부로 노인 미부 이야기』)고 한다.

4. 평가

야마나미 게이스케는 신센구미 내에서 드물게 학식이 깊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북진일도류와 천연이심류를 익힌 검객이면서도, 그의 친절하고 온화한 성격은 조직 내에서 다른 대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성품 때문에 강경 노선을 주장했던 히지카타 토시조와는 대립적인 인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우애가 깊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면모는 당시 혼란스러운 에도 막부 말기 상황 속에서 신센구미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다른 대원들과 다른 고민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신센구미의 점차 과격해지는 방향성에 회의를 느끼고 1865년 탈주를 결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비록 오미국 오쓰시에서 오키타 소지에게 붙잡혀 돌아온 뒤 조직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음력 2월 23일 할복하여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죽음은 단순한 규율 위반 처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신센구미 내부의 노선 갈등과 함께, 조직이 점차 강경 노선으로 치닫으며 온건파의 입지가 좁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존재와 죽음은 신센구미라는 조직의 복잡한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야마나미 게이스케는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졌으며, 주로 신선조를 소재로 한 작품에 등장한다.

'''영화'''


  • 라몬 코사부로 - 신선조 제1부 경락풍운의 권 (1952년)
  • 가가 구니오 - 신선조 오니대장 (1954년)
  • 다테 사부로 - 신선조 시말기 (1963년)
  • 사토 케이 - 신선조 혈풍록 곤도 이사미 (1963년)
  • 오토모 야타로 - 막말 잔혹 이야기 (1964년)
  • 나카무라 우메노스케 - 신선조 (1969년 영화)
  • 가와라자키 지로 - 오키타 소지 (1974년 영화)
  • 사다나가 토시 - 막말 순정전 (1991년)
  • 우지키 츠요시 - 신선조 (2000년 영화)
  • 나카노 히데오 - 실록 신선조 (2006년)
  • 야스이 쥰페이 - 타올라라 검 (2021년)


'''애니메이션'''

  • 이노우에 노리히로 - 신선조 이문 PEACE MAKER (2003년)
  • 사카구치 테츠오 - 히지카타 토시조 하얀 궤적 (2004년)
  • 토비타 노부오 - 박앵귀 시리즈 (2008년~)


'''연극/무대'''

  • 와타나베 후미오 - 타올라라 검 (1974년)
  • 하바 유이치 - 타올라라 검 (2004년)
  • 토츠기 시게유키 - TEAM NACS 제10회 공연 LOOSER ~잃어버린 앨범~ (2004년)
  • 요시야 코타로 - 신선조 이문 PEACE MAKER (2007년)
  • 우에스기 히카루 - 신선조 이문 PEACE MAKER (2009년)
  • 사토 타로 - 신선조 이문 PEACE MAKER (2011년)
  • 테루마 - 뮤지컬 박앵귀 시리즈 (2015년~2023년)


'''게임'''

'''소설'''

  • 도몬 후유지 「신선조 야마나미 게이스케」 (1975년, 신진물왕래사 / 2007년, 가쿠요 쇼보 인물 문고)

5. 1. 드라마


  • 신선조 혈풍록 (텔레비전 드라마) (1965년) - 하야카와 켄키치
  • 타올라라 검 (1970년) - 가와카미 가즈오
  • 신선조 (텔레비전 드라마) (1973년) - 히노시타 다케시
  • 신선조 시말기 (1977년) - 다카하시 쵸에이
  • 미부의 연가 (1983년) - 키시베 잇토쿠
  • 타올라라 검 (1990년) - 요코미츠 가츠히코
  • 신선조 혈풍록 (텔레비전 드라마) (1998년) - 미우라 요이치
  • 신센구미! (NHK, 2004년) - 사카이 마사토
  • 신선조 혈풍록 (텔레비전 드라마) (2011년) - 마츠시타 테츠
  • 너와 함께 피어나~신선조 청춘록~ (2024년) - 나가타 타카토

5. 2. 게임


  • 박앵귀 시리즈 (2008년~2023년)
  • Fate/Grand Order (2015년~)

참조

[1] 웹사이트 030:山南敬助は仙台の脱藩者かどうか(P99 - 101) https://lib-www.smt.[...] 仙台市図書館公式サイト 2021-08-21
[2] 서적
[3] 서적 新選組日誌 上 新人物文庫
[4] 서적 『維新史蹟図説 京都の巻』 184ページ 東山書房
[5] 문서 浅野長矩는 切腹전에 湯漬け를 要求한 後에 다시 介錯에 失敗해서 首를 二度 斬り되어 血이 四方에 飛び散る등의 보기 흉한 최후였다.
[6] 서적 激白新撰組 七たび斬られた男の実録 毎日ワン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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